700년 전 바다를 건넌 ‘붉은 나무’
신안선 자단목에서 되살아난 중세 동아시아 국제물류의 비밀

파스파 문자·천자문·일본 가나까지…
나무에 새긴 ‘700년 전 바코드’
1323년 중국 닝보에서 일본으로 향하던 신안선…
자단목 1천여 점이 말하는 동아시아 교역사

바닷속에서 700년을 견딘 한 토막의 나무가 중세 동아시아 국제무역의 비밀을 풀어내고 있다.
1976년 본격적인 수중발굴이 시작된 신안선에서 발견된 자단목(紫檀木)이다.
국가유산청 국립해양유산연구소가 한국 수중발굴 50주년을 맞아 마련한 특별전 ‘바다를 건넌 나무, 자단’은 지금까지 주로 고급 목재나 무역품으로 바라봤던 자단목을 14세기 동아시아의 국제 물류정보를 기록한 매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다.

이번 전시의 백미는 자단목에 새겨진 작은 문자와 표식이다.

오늘날 상품에 바코드와 물류번호가 붙듯, 700년 전 바다를 오가던 자단목에도 소유·분류·검수·인수를 위한 것으로 해석되는 문자와 기호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흔적 속에는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를 연결했던 거대한 해상 교역망이 숨어 있었다.
■ 1323년 신안 앞바다에 멈춘 ‘국제무역선’

신안선은 1323년 중국 경원, 오늘날의 닝보를 출발해 일본으로 향하다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역선이다.
1975년 신안 증도 인근에서 어부의 그물에 도자기가 걸려 올라오면서 세상에 존재가 알려졌고,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수중발굴이 진행됐다. 이 신안선 발굴은 대한민국 수중고고학의 출발점이 됐다.
신안선에는 도자기뿐만 아니라 1천여 점이 넘는 자단목이 실려 있었다.
자단은 동남아시아와 인도 등지에서 생산되는 단단하고 붉은빛을 띠는 고급 목재였다.
가구와 바둑판, 문방구와 불교 공예품, 향과 관련된 기물 등 최고급 제품의 소재로 사용됐다.
즉 신안선에 실린 자단목은 단순한 목재 화물이 아니었다. 당시 동아시아 상류사회와 사찰, 귀족계층 등이 소비하던 고부가가치 국제교역 상품이었다.
■ 700년 전 나무에서 발견한 ‘바코드’
이번 특별전이 특히 주목되는 이유는 신안선에서 출수된 자단목의 3차원 디지털(3D) 정밀 기록화 과정에서 문자와 문양을 새롭게 분석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숫자나 로마자 계통 문자처럼 여겨졌던 일부 음각 표식 가운데 원나라 공식문자인 ‘파스파 문자’가 확인됐다. 관련 유물 6점이 이번 특별전에서 소개된다.
새롭게 판독된 문자는 ‘지(ji)’로 발음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파스파 문자가 원 제국의 통치·행정·외교를 담당한 집권층을 중심으로 사용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연구진은 이 표식이 집권층의 권위를 상징하거나 화물을 공식적으로 검수·관리하는 과정에서 사용됐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작은 문자 하나가 신안선의 교역이 단순한 민간 상거래를 넘어 원 제국의 행정·유통체계와 연결됐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서가 된 셈이다.
■ ‘천·황·주’…천자문이 물류번호였다
더 흥미로운 것은 한자다.
한자가 새겨진 자단목 약 160점에서는
‘천삼(天三)’
‘천육(天六)’
‘황오(黃五)’
‘주칠호(宙柒號)’
등의 표기가 확인됐다.
‘천(天)·황(黃)·주(宙)’는 바로 천자문 첫머리인 ‘천지현황 우주홍황(天地玄黃 宇宙洪荒)’에 등장하는 글자들이다.
여기에 숫자 또는 ‘호(號)’가 결합돼 있다.
국립해양유산연구소는 이를 통해 천자문 글자를 화물 분류 기호로 사용하고 숫자를 일련번호처럼 붙여 자단목을 체계적으로 관리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해석하고 있다.
현대 물류에 빗대면 일종의 상품 분류코드와 관리번호인 셈이다.
700년 전에도 수많은 국제화물을 정확하게 분류하고 목적지까지 전달하기 위한 상당히 체계적인 물류관리 방식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중국 문자 옆에 일본 글자가
자단목에서는 일본 가나 문자도 발견됐다.
신안선 출수 목간에는 ‘마코사부로(まこ三郎)’와 ‘이야지로(いや二らう)’ 등 일본식 인명이 기록돼 있었는데, 자단목에서도 이와 동일한 이름과 서명 형태의 수결(手決·화압)이 확인됐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목간과 자단목의 정보가 서로 대응한다는 점이다.
화물 묶음에 매달았던 목간은 오늘날의 ‘화물표’와 비슷하고, 자단목에 직접 새긴 표식은 상품 자체에 표시한 관리정보와 유사하다.
두 정보를 서로 대조하면 선적·운송·검수·인수 과정에서 화물이 바뀌거나 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연구소는 이를 신안선의 최종 목적지였던 일본 도후쿠지(東福寺) 등 일본 측 관계자들이 선적과 유통 과정에 깊이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연구 성과로 설명한다.
■ 자단목은 왜 그토록 귀했을까

자단은 단단하고 붉은빛을 띠며 은은한 향을 지닌 귀한 목재였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오래전부터 최고급 목재로 인식됐다. 중국에서는 아열대 지역의 고급 나무와 서역·동남아시아에서 들여온 귀한 목재를 가구와 공예품 등에 사용했고, 일본에서도 자단을 고급 공예 소재로 활용했다.
특별전은 이러한 자단의 쓰임을 실제 유물을 통해 보여준다.
자단으로 만든 불교 관련 공예품, 자단돈, 자단의, 향로와 향병 등은 한 그루의 나무가 국제교역을 거쳐 종교와 생활문화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결국 자단은 단순한 원목이 아니라 부와 권력, 종교와 생활문화까지 연결한 중세 동아시아의 명품 소재였던 셈이다.
■ 1976년 바다에서 만난 붉은 나무

이번 특별전에는 또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2026년은 우리나라 수중발굴이 시작된 지 50년이 되는 해다.
1976년 신안 앞바다에서 시작된 수중발굴은 반세기 동안 우리 바닷속에 잠들어 있던 수많은 문화유산을 세상으로 끌어올렸다. 국립해양유산연구소는 올해 50주년 슬로건을 ‘역사의 물살, 미래의 물결’로 정하고 특별전과 국제학술대회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진행했다.
50년 전 발굴 당시 자단목은 수많은 신안선 유물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3D 스캐닝과 적외선 조사 등 현대적인 기록·분석 기술이 더해지면서 이제 그 나무에 새겨진 작은 문자 하나까지 새로운 역사자료가 되고 있다.
발굴에서 기록으로, 기록에서 해석으로. 한국 수중고고학 50년의 발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 신안선은 ‘침몰선’이 아니라 14세기 물류창고

이번 연구 성과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신안선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다.
신안선을 단순히 많은 유물을 실은 채 침몰한 옛 무역선으로만 바라본다면 자단목은 수많은 화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단목의 파스파 문자·한자·천자문·가나 문자·수결·문양을 하나씩 연결하면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동남아시아 등에서 생산된 고급 목재가 중국의 국제항구로 모이고, 그곳에서 분류와 검수를 거쳐 배에 실린 뒤 일본의 사찰과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중세 동아시아 국제 공급망의 흔적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일본·동남아시아가 바다를 통해 연결되고 상품뿐 아니라 문자와 종교, 생활문화까지 함께 이동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안선은 700년 전 동아시아의 국제물류 시스템을 그대로 바닷속에 보존한 ‘타임캡슐’이라 할 만하다. 이는 연구소가 자단목을 당시 물류 체계를 담은 ‘기록 매체’로 새롭게 조명하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 관광의 시선으로 본 특별전…목포에서 만나는 ‘700년 전 세계화’
이번 특별전은 문화유산 연구 성과에 머물지 않는다.
목포 관광의 관점에서 보면 근대역사문화공간 중심의 기존 역사관광을 바다와 수중유산, 신안선으로 확장할 수 있는 콘텐츠라는 의미가 있다.
목포를 찾은 관광객이 근대역사관과 원도심에서 근현대사를 만난 뒤 수중유산박물관에서 700년 전 동아시아 해상교역사를 접한다면 목포의 역사관광 시간축은 근대 100여 년에서 중세 700년 전까지 크게 확장된다.
특히 신안선이라는 세계적인 수중문화유산과 ‘700년 전 바코드’라는 이해하기 쉬운 스토리텔링을 결합한다면 어린이·가족 관광객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경쟁력 있는 역사문화 콘텐츠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이번 전시를 단순히 ‘유물을 보는 박물관’이 아니라 바다를 통해 세계와 연결됐던 동아시아 사람들의 삶과 교역을 체험하는 공간으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전시안내】
특별전 : 「바다를 건넌 나무, 자단」
기간 : 2026년 9월 15일~2027년 2월 14일
장소 :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수중유산박물관 기획전시실











